[3.1절 특집] 일제 치하 재림교인들의 항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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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만세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종교별 통계에 따르면 구세군이 10명, 성공회가 4명, 천주교가 57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은 5명이 수감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5명의 재림교인 수감자 명단에 포함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순안의명학교 교사 전홍석 씨도 3.1만세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극렬한” 인물로서 순안만세운동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돼 일경에 체포됐다. 경기도 용인군 마평리의 교인 홍재설 씨도 기미년 만세사건으로 두 차례나 감옥살이를 했다.
의명학교 2회 졸업생으로 1919년 당시 순안병원장이었던 노설 의사의 일급 조력자로 일하던 강봉호 씨도 일제 경찰로부터 항일적 인물로 지목돼 감시를 받던 중 상해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선생을 찾아 순안을 탈출했다. 강봉호 씨는 상해에서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1919년 중반기에 상해임시정부 재정관에 위촉됐으나 정치 참여를 꺼리는 재림교회 신앙 때문에 안창호 선생의 권유를 사양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같은 의명학교 2회 졸업생 장병삼 선생도 3.1운동의 피의자로 북간도 삼도구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동창생인 박윤선 전도사를 만나 산명여자소학교를 설립했다. 안창호 선생에 따르면 상해에서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최승봉 씨도 “본디 안식일교인으로서 김창세 의사의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이 밖에 의명학교 교사나 일반 교인 가운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이 투철한 사람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영순 목사는 자신이 의명학교에 수학할 당시에 김봉걸 선생이 민족주의적 애국자였다고 회고했다. 또 초기 재림교회 지도적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김항모 목사의 맏사위이면서 흑교교회 목회자로서 재림교회 사역자로 봉사했던 김병모 씨도 독립자금 조달 혐의로 일경의 감시에 시달리다가 강봉호 씨와 함께 상해로 망명한 후 멕시코로 갔다.
여러 해 동안 시조사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유영순 목사도 투철한 민족주의자로서 비밀히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그는 3.1운동 후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격문을 시조사의 등사판으로 수백 매씩 등사해 공급하는 일을 서너 차례나 했다.
1920년 1월에는 동향 친구이면서 재림교인인 최덕성 씨를 통해 상해임시정부 내무부장 안창호 선생이 안식일교회에게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라고 호소하는 명령서를 받고 동생인 유흥순 씨와 시조사의 유진상, 김원제, 권학규 씨 등과 협력해 독립선언문 2000매를 비밀리에 인쇄했다.
그러나 이 문건을 시내의 독립운동 지도부에 전달하려고 운반하던 중 유진상, 유진익 형제가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유영순 목사 등 다른 동지들은 다행히 탄로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유진상 씨는 징역 2년6개월, 권학규 씨는 징역 2년 그리고 유진익 씨는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불행히도 권학규 씨는 복역 중 옥고로 사망했다. 이들은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이 일은 당시 신문에 여러 차례 크게 보도됐다. 하지만 시조사의 안식일교인들이 주동한 사건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유영순 목사의 후술에 의하면 김선문 씨가 의명학교 출신으로서 독립단에 가담했는데, 그를 경찰의 감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유영순 목사가 자신의 집에 한 달 가까이 독립운동에 협력하는 정신으로 은닉했다. - <한국 재림교회 100년사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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