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림교회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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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5월, 이응현(李應顯)과 손흥조(孫興祚)가 하와이 이민 길에 일본 고베에서 구니야 히데(國谷秀) 전도사에게 침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재림교인이 되었다. 이민자 신체검사에 불합격한 손흥조는 귀국 도상에서 임형주를 만나 재림 기별을 전했고 이들은 한반도 선교의 기틀을 다졌다.
첫 선교 집회
1904년 8~9월, 임형주는 진남포로 돌아와 이름을 임기반(林基磐)으로 개명하고, 재림 신앙 구도자 30여 명을 모아 구니야 히데 전도사와 일본미션 감독 필드(F. W. Field) 목사를 초청했다. 이들은 각각 평안남도 진남포, 용강, 강서, 중화 등지에서 선교 집회를 열었고 이는 한국에 첫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임기반 / 구니야 히데 목사 / 필드 목사
첫 교회
1904년 8월과 9월, 내한한 일본미션 감독 필드 목사는 입성리, 남삼리, 구룡리, 간곡리 4곳에 첫 교회(선돌, 강대모루, 용동, 바메기)를 조직하고 일본미션의 부속으로 한국미션필드를 만들었다.
첫 내한 선교사
1905년 11월 17일, 스미스 목사 부부(W. R. Smith, Addie Bille Smith)가 한국 최초의 대총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스미스 목사 부부는 먼 이국땅에서 질병과 가난으로 고초를 겪었으나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첫 학교
사엄태 여사 / 순안의명학교
1907년 9월, 스미스 목사는 함께 선교사로 내한한 사엄태(Mimi Scharffenberg) 선생과 함께 순안 석박산 기슭에 사역자 양성 학교를 세웠다. 이곳에서 ‘한국인 사역자 양성 과정(Korean Workers Training Course, 삼육대학교 신학과의 전신)’을 가르쳤고 1909년 9월 설립 인가를 신청하며 ‘의명학교’로 명명했다.
첫 병원
순안진료소
1908년 9월, 노설(Riley Russell, MD) 의사 부부와 선교사 스콧(Helen May Scott) 선생이 내한하여 순안 사역자 양성 학교의 교실 한 칸에서 순안 진료소를 열었다. 그 후 대총회 헌금을 지원받아 새 건물을 건축, 순안병원으로 발전했고 이는 삼육서울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첫 조직
전시열 목사 / 스미스 목사
1908년 10월, 전시열(C. L. Butterfield) 목사가 내한하여 순안에 정착했고, 그는 11월 8일 한국 선교지를 일본미션에서 독립시켜 조선미션(Korean Mission)을 설립했다. 조선미션은 감독에 전시열 목사, 서기에 스미스 목사가 선임되었고, 5개의 교회와 6개의 예배소, 155명의 교인으로 구성되었다.
첫 안수 목사
1915년 4월, 순안에서 열린 제5회 조선미션연회에서 정문국(鄭文國)과 이근억(李根億)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수 목사, 의명학교 졸업생과 같은 본방인 지도자들의 등장으로 선교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정문국 목사
첫 대회
제1회 합회 총회
1917년 2월, 서울에서 열린 제6회 조선미션연회에서 조선미션이 조선대회(The Chosen Conference)로 승격됐다. 2년 뒤, 조선대회는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로 승격되었고 조선합회장에 전시열(C. L. Butterfield) 목사를 선임했다.
회기동 이전 역사
1909년 9월, 순안에 있던 선교 본부와 출판사를 서울시 북부의 월암동으로 옮겨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본부를 세웠다. 1912년 7월에는 대총회 지원금으로 서울 회기동에 부지 1,469평을 매입했고, 선교 본부와 인쇄소를 건축하고 본부를 이전하여 회기동 시대를 열었다.
조직 변천 과정
초창기 선교 본부 겸 출판사
1904년 일본미션의 부속으로 시작된 조선미션은 일본미션에서 독립하여 조선미션(1908년), 조선대회(1917년), 조선합회(1919년)로 승격했다. 조선합회 초대 합회장으로는 전시열 목사가 취임했고, 전국의 선교 지역을 서선대회, 중선미션, 남선미션으로 나누었다. 1922년 2월에는 재단법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조선합회 유지재단을 설립했으며, 1929년 6월에는 선교 지역을 모두 ‘대회’로 통칭했다.
- 한국 선교 120주년 준비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