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지 않고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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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창조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졸졸 흐르는 냇가를 따라 두 형제가 걷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둘은 공통점이 아주 많았음에도 여러 면에서 너무 달랐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똑같은 보살핌을 받고 자랐지만 성격과 개성은 천양지차였다.
문제
형 가인은 뚱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가족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들였지만, 가인은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처럼 단순한 실수 하나로 인류를 그토록 가혹하게 벌하시는 이유에 대해 자주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일로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을 독단적이고 불공평한 처사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제물과 희생 제사를 구원 계획의 일부로 삼으셨고 가인과 아벨은 같은 제단을 쌓았지만 제단 위에 무엇을 드렸는지로 각자의 마음과 믿음의 정도가 드러났다.
아벨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자기 양 떼 중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에 좋게 보셨고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불이 제단을 휘감으며 아벨의 제물에 하늘의 임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이 택한 제물을 바쳤다. 그는 땅에서 거둔 소출을 제단에 올렸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기뻐하셨다는 어떤 증표도 없었다. 가인은 창피했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아벨은 가인에게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따르라고 간청했지만 그럴수록 가인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길을 가기로 고집을 부렸다. “가인과 아벨은 마지막 때까지 세상에(그리고 교회에) 존재할 두 부류를 대표한다.”*
가인은 하나님이 불공정하다며 계속 불평했고 동생을 불같이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대응 방식에 대해 그와 언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의 분노는 갈수록 거세졌다. 이성과 양심은 아벨이 옳다고 지적했지만 분노에 휩싸인 가인은 평정을 잃었다. 어느 날 가인은 아벨에게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없으니 밖에 나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성경에 따르면 두 사람은 들판을 함께 걸었고 가인은 갑자기 격분하여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푸른 풀밭에 아벨이 쓰러졌고 무고한 그의 피가 이슬과 함께 흘렸다.
이 세상에서 발생한 최초의 폭력이 분노의 결과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가인이 화를 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거절당하자 가인은 몹시 분하여 얼굴빛이 변했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4:5). 주님은 가인에게 물으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6절). 가인에게는 분노 문제가 있었다.
화내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는 우리를 하늘에서 멀어지게 하는 행동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행동 중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중에는 평소 잘 언급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에게 해당되며, 하나님의 나라에 가려면 누구나 극복해야 할 품성적 결함을 드러내는 죄가 있다. 바로 분노를 터뜨리는 죄이다. 성질부리는 사람은 하늘에 가지 못한다.
이 말은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이다. 분노의 영을 따라 살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화내는 죄와 습관을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 하늘의 면류관과 저택이 예비되어 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 화를 내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우리는 간음이나 살인 같은 것을 심각한 죄로 떠올릴 때가 많다. 그러나 분을 참지 못하는 이 끔찍한 습관 때문에 싸움이 생기고 가정이 전쟁터로 바뀐다. 작지만 고약한 이 습관을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분노는 숨길 수 없다. 아무리 꾹꾹 억누르고 있어도 마음속에 분노가 살아 있으면 결국은 터져 나온다. 분노는 건강을 해친다. 성질을 부리면 소화기관, 신경계, 호흡기관에 장해가 생기고 혈압도 오른다.
사람들은 화나면 이상한 행동을 한다.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거나 안면 몰수를 하기도 한다. 잠시의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행동하고 말하기로 한 서약이 내팽개쳐진다. ‘화났는데 어쩌라고? 분노를 표현하는 건 내 권리고,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딱 한 가지이다. 나를 건드린 상대방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는 것이 과연 자신의 구원을 희생해도 될 만큼 기분 좋은 일일까?
최초의 화난 영혼은 악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성질부리기로 선택하는 사람은 악마를 자신의 아비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겪는 문제이다
영적인 인물 중에도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은 이가 있다. 모세는 분노와 씨름했고 삼손은 분노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마리아에 먼저 보내어 자신의 방문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거절의 메시지였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쉴 곳이 필요했지만 주민들은 하늘의 손님을 문전박대했다. 제자들은 화가 났고 자신의 선생을 무시한 그들에게 하늘의 불이 내려와 살라 버리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해 분개하는 제자들의 열정을 꾸짖으셨다.
우리는 모두 분노를 느낄 때가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러한 분노에 휩싸이는가? 아니면 분노를 삭이는가? 화가 나면 누구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신에게 화가 날 때도 있는데 흔히 자신에 대해서는 쉽게 용서가 되지만 남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며 화를 내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 그것은 의로운 분노였다. 보통 우리의 분노에는 의로운 구석이 전혀 없다. 둘째, 예수님은 속임수, 부패한 체제,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뒤틀어 왜곡하는 제도에 대해 분노하셨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개인에게 부당한 분노를 표현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분노는 다름 아닌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제멋대로 분노를 쏟아내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할 수는 없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분노를 살인과 하나로 여기셨다. 그리고 하늘로 여행하는 사람이 가져갈 수 없는 수화물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화’라고 말씀하신다. 공개적이든 개인적이든 수시로든 가끔이든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자신을 가장 아껴 주는 이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리 성질을 부려도 그들이 여전해 사랑해 주리라 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러분을 사랑해 주는 이들을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는 하치장으로 여기지 말라.
실제적인 대응법
분노 문제를 인정하려면 겸손해야 한다. 분노 극복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분노에는 단계가 있고 사람에 따라 그 단계가 빠르게 혹은 천천히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는 짜증이다. 짜증 나는 일이 생기면 속이 부글거리는데 이 짜증과 불만이 분노의 방아쇠이다.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주자면, 짜증의 단계는 분노를 관리하기 가장 쉬운 단계다. 다음 단계로 이어질수록 분노의 물결을 조절하고 늦추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짜증을 영적이고 유쾌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처리하면 분노 단계는 거기서 멈춘다. 짜증이라는 첫 단계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는 누구의 말이나 행동에도 짜증을 내지 않겠다.’고 되뇌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회복력, 긍정적인 태도, 확고함을 키우라. 첫 단계에서 승리하라.
분노의 두 번째 단계는 악화이다. 짜증이 심해진 사람은 발사대 위의 로켓과 같다. 연료가 준비되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5, 4, 3, 2, 1, 중단, 중단! 중단시키지 않으면 악화된다.
악화의 다음 단계는 흥분이다. 흥분이란 짜증과 악화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짜증과 악화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려는 결심을 정당화한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거짓말하고 다니거나 자기 것을 훔쳤다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으로 반격하려는 충동이 생긴다.
그러면 공격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공격성은 욕설과 위협과 다툼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말 폭탄 심지어 치고받는 몸싸움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공격성은 말, 행동, 고발, 태도, 성깔, 어조에서 드러난다.
‘그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란 말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자기방어에 꼭 분노가 필요한가? 한번은 어느 어르신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화내지 말고 똑똑해지게.” 자기방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 공격 단계에서는 판단력이 사라진다. 공개적인 공격은 분노의 절정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도로변에서 자주 사용하는 사제 폭탄을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급조 폭발 장치)라고 한다. 그런데 심리학계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IED가 있다. 바로 ‘간헐적 폭발 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이다. 이 폭탄이 터지면 인간관계에 부상, 화상, 평생 불구를 겪을 수 있고 가정은 고통과 고난을 겪는다.
명백한 공격과 소극적인 공격이 있는데 소극적인 공격 또한 치명적이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데도 그냥 놔두는 것이 소극적 공격이다.
분노의 마지막 단계는 우울증이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아가 최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마다 또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마다 후회가 몰려오고,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토라지고 원망하고 침체에 빠진다. 분노와 우울증은 정서적으로 사촌지간이다. 분노를 내버려두면 마귀가 기회를 타고 들어와 하나님이 우리 삶에 이루고 계시는 일을 망쳐 놓는다. 분노로 남는 것은 적대감과 쓰라림이다.
변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왜 화를 내는지 분석해 보라. 방아쇠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라. 그런 다음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인정하고 화를 터뜨리는 것은 결코 영적이지 않으며 하늘에 이르는 길을 막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신령한 도움을 구하라. 짜증의 단계에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면 이어지는 단계들을 해결하는 데는 성령의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필요해진다는 점을 명심하라. 짜증이 찾아오면 대쟁투라는 거대 담론과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큰 그림에 집중하라. 내가 돌보는 이들이 짜증 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으며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골칫거리에 대해 관대하고 그런 것에 언짢아하지 말라. 그러면 ‘간헐적 폭발 장애’라는 사제 폭탄의 설치를 막을 수 있다. 쌓이고 쌓이다가 스파크가 일어나 폭발하고 고통스런 후유증을 겪는 일도 없을 것이다.
- 윈들리 핍스 미국 플로리다 팜베이 재림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