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인형이 치른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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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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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금 인형이 긴 여행 끝에 해변에 도달한다. 그리고 거기서 처음으로 매력적인 바다를 보게 된다. 소금 인형은 바다에 마음이 끌려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본다. 하지만 바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걸어 본다. “너는 누구니?” “나는 바다야.” “너에 대해 알려 줘.” “나는 그냥 나야. 바다라고.” 소금 인형이 묻는다. “너에 대해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니?” 바다가 대답한다. “나에 대해 정말 알고 싶다면 가까이 와서 나를 만져 봐.” 소금 인형은 한쪽 발을 물속에 담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인형이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발은 이미 녹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 속은 거야?” “아니야. 네가 나를 알기 원한다면 너 자신의 무엇인가를 나에게 줄 수 있어야 해.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면 너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해.” 그 말을 들은 소금 인형은 바다로 다시 천천히, 점점 더 깊이 들어갔고 완전히 바닷물에 녹아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인형이 외쳤다. “이제야 바다가 무엇인지 알겠어! 하지만 모든 것은 아니야!”
이 이야기는 피터 라이브스가 쓴 ‘소금 인형’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이 이야기에서 유독 관심을 끄는 대목은 “나를 알기 원한다면 너 자신의 무엇인가를 나에게 줄 수 있어야 해.”이다. 안다는 것은 준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궁금하고, 알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답을 찾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완전히 녹아 버린 소금 인형의 외침은 또 다른 생각을 갖게 한다. “바다가 무엇인지 알겠어! 하지만 모든 것은 아니야!” 무슨 말인가? 그 속에 들어가 녹았지만 바다에 대해 전부를 알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아는 것도 단계가 있다는 말이다.
유명한 축구 선수가 은퇴한 후 『생각이 내가 된다』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나의 주인은’이라는 제목 아래 자신이 겪었던 영적 갈등에 대해 서술한다. 그는 하나님을 주인이자 왕으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서 성경 말씀과 자신의 삶 사이에 괴리를 느꼈다. 이 괴리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이 진정 올바른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기쁘지 않고 감사하지 못함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너의 주인이 누구니?”라고 물으셨고, 그는 자신의 신앙의 본모습을 직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종인 것처럼 행동해 온 것에 깊은 불편함을 느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자신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던 모호한 상황을 청산해야 할 두려움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의 자아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마침내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주인임을 진심으로 고백했다. 이 고백을 통해 그는 새로운 평안을 경험했다. 그는 하나님만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임을 이해하게 되었고,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영표 씨의 신앙 경험의 일부이며, 아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주인으로 모시게 된 이야기이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만큼 시간과 돈 그리고 마음을 써서 알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노아의 방주가 정말 아라랏산에 정박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멸망했다면 그 모습은 어떠할까,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면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등 끊임없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학을 떠나고, 어떤 사람은 성지 탐사나 순례를 다녀온다. 성경상으로 봤을 때 사실상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말씀대로 산다면 그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좀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물을 원하기에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성지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집트와 요르단, 튀르키예, 그리스, 유럽까지 포함한다. 한 번의 방문으로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곳을 다 방문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일부를 확인하며 새로운 믿음의 디딤돌을 한 단계씩 쌓아 간다.
문제는 무관심이다. 성경은 큰 홍수를 앞두고 120년 동안 홍수로 세상을 심판할 것을 노아를 통해 경고했다. 그러면서 노아에게 방주를 준비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그 안에 들어가 생명을 보존하라고 호소했지만 노아의 가족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유는 이런 심판이라는 심각한 주제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살기도 바쁘다고 하면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주제에 무관심한 대부분의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 결과는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기준이 자신에게 있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할 때 사람은 시야가 좁아지고 오직 자신만 보인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는 사람이 악한 일만을 계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교만과 허위와 방탕과 잔혹이 그들의 품성으로 굳어졌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임에 틀림없다(GC, 542).
돈, 명예, 자존심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곤고한 사람’으로 묘사한다(롬 7:24).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무엇을 깨달을 때 가장 행복한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마음과 뜻을 아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고 느껴지는가? 인애, 공평, 정직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동기, 새로운 소원이 필요하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때 가능하다.
세상에서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쟁에서 이기고, 경기에서 승리하며, 실력을 인정받고, 목표를 달성하고,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재미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즐거움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불쌍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도우며,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이다.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하늘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 연구할 것이다. 섬기고, 봉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행복하게 살다가 하늘에 함께 가길 소망한다. 우리의 삶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돌아보자. 그리고 ‘소금 인형’처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바다로 뛰어들어 바다를 알아가 보자. 바닷가만 거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나서 보자. 그리고 한 단계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자. 머뭇거리다가 포기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 성시현 시조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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