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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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3일 제주대회 창립총회 현장. 새로운 조직체의 출범과 함께 상호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경영위원회 시간이었다.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가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그는 “성산포 피난교회를 복원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6회에 걸쳐 피난교회를 주제로 진행한 <내러티브 리포트>를 쓰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연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다시 그를 찾아가 피난교회의 의미와 옛 교회를 이제라도 되찾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5월 7일 신학관 4층, 오 교수는 기자를 엘렌화잇연구소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로 안내했다.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그는 기자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피난교회를 직접 본 소감을 물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있었던 일을 간추려 이야기했다. 현장에서 만났던 많은 이들에게 취재의 취지와 과정을 여러 번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며 새로 발견한 정보를 추가했다. 아마 오 교수에게 전달하는 이 이야기가 그 최종 버전이었을지 모른다.
“참 다행입니다. 내가 노구를 이끌고 제주까지 가서 절차를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권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피난교회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조건이나 절차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것이군요?”
실무를 맡은 주무관이 피난교회가 문화재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등록신청을 하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 교수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문화재 등록신청은 건물의 소유주만 할 수 있다고 하자, 어느 정도 예상했다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피난교회를 되찾는 일에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제주의 자그만 교회를 되찾는 일에 왜 한국 재림교회가 나서야 할까요? 그건 다름 아닌 피난교회는 제주를 넘어 한국 재림교회 전체의 사적지이기 때문입니다!”
1951년 당시 성산포에 내린 재림성도는 1000여 명이었다. 그중에는 연합회 본부, 삼육초중등학교, 위생병원, 시조사 등 한국 재림교회의 여러 기관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 재림교회 전체가 성산포로 옮겨진 것이다. 그렇기에 피난 온 성도들에 의해 세워진 피난교회는 단지 제주만의 사적지가 아니라 한국 재림교회의 사적지라는 게 오만규 교수의 주장이다.
“구약의 가장 큰 역사 두 줄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출애굽과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역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난 행렬’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재림교회의 가장 큰 역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교회 해산과 6·25전쟁 시기의 제주 성산포 피난생활입니다. 피난교회는 이처럼 큰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로 지어진 것입니다. 사실상 한국 재림교회 성도 전체의 손으로 쌓아 올린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피난교회를 지금처럼 이방인의 손에 넘어간 채로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피난교회를 한국 재림교회사에서 우뚝 솟은 기념비적 건물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피난교회를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연합회 총회 경영위원회에서만 5차례 안건으로 제시했지만, 피난교회는 여전히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연합회 차원에서 처리해야 할 급한 일들이 있는 것은 알지만,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보존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오 교수는 갑자기 기자에게 퀴즈를 냈다. “당시에 재림교회 피난민들이 동초등학교(현 성산초등학교)와 성산수산고등학교에 몸을 맡겼고, 위생병원이 성산 서초등학교(현 동남초등학교)에서 제주분원을 개원했습니다. 그럼 학생들은 어디에서 공부했을까요?”
취재하면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재림교회의 행적을 중심으로 추적하느라 현지 학생들의 움직임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기자의 생각이 길어지자 오 교수는 “그들이 다 어디에 갔겠어요. 마을회관에서 오밀조밀 모여 공부했습니다”라며 자문자답했다. 이제 그는 역사학자이기 전에 제주 성산포 신양리 주민으로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많은 경우 재림교회가 성산포 주민들에게 끼친 감화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주민들도 희생했습니다. 자신의 방 한 칸을 내어주고 피난생활을 돕지 않았습니까. 이방인이라 할 수 있을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조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 교수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피난생활이 마치고 재림성도들이 육지로 돌아온 후 동고동락했던 주민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거나 안부를 물었던 성도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피난생활 동안 뿌려진 씨앗이 스스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었지만, 그 과정에서 피난 왔던 성도들의 개입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오 교수는 “성산포가 얼마나 큰 선교지였습니까. 하지만 피난생활이 끝난 후 대부분 성산포를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 후 류제한 박사가 제주를 위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제주의 영혼들을 위해 교회가 없는 서귀포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우리의 시각이었다는 것이 오 교수의 지적이다. 서귀포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훌륭하지만, 전쟁 중에 피난 온 재림성도와 함께 생활했던 성산포 주민들은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피난교회를 복원하는 일은 당시 한마음으로 전쟁을 견뎌온 재림성도와 지역주민의 연결고리로 작용할 것이며,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자리매김할 것이기에 더더욱 복원계획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 교수는 이를 위해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보내주고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들이 수없이 바쁘고 급한 일이 있음에도 우리의 역사를 보존하고 성찰하는 일에 의식을 갖고 나서주기를 간청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함께 기도하는 오만규 교수의 목소리는 지난해 9월 제주대회 창립총회에서처럼 떨리고 있었다. 한국 재림교회의 사적지인 피난교회가 문화재로 인정받아 보존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 것 같았다.
* 지난 17회 동안 <내러티브 리포트>에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취재를 위해 지원해준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에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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