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interview-e] 예천새움교회 남복순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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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용하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지금도 당신만의 계획표대로 ‘한 사람’을 살리고 ‘한 교회’를 짓고 ‘한 나라’를 일으키신다.
남복순 집사(예천새움교회)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약 50년 전, 적금통장을 만들고, 언젠가는 하나님께 드리겠다던 서원이 역사로 이뤄졌으니 말이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모을 수 있을 때 모으자는 생각으로 매월 8만 원씩 적금을 넣었어요. 꼭~ 필요한 때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마음으로요”
그렇게 46년 동안 꼬박꼬박 돈을 모았다. 당시 8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긴 세월이다.
그녀는 1970년 남편(박재화 장로)과 결혼하면서 맨몸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남편은 한국연합회와 삼육서울병원에서 근무했다. 성실했지만 기관 월급으로는 자녀를 키우기에 빠듯했다. 아이가 어리니 맞벌이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나마 미용 기술이 있다는 게 동네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기 시작했다. 차마 돌려보낼 수 없어 적은 돈만 받고 머리를 만져 주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지며 어느 날부터인가 손님이 쉬지 않고 몰려들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대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아이들 학교만 겨우 보내고 온종일 머리만 말았다.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일과를 끝내면 몸은 파김치가 됐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꼭 그날의 십일금을 구별했다. 일주일 동안 모았다가 안식일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손님의 머리를 말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쳤다. 근처 미용실에서 누군가를 손님으로 위장시켰다가 불법 영업을 한다며 신고한 것이었다. 파출소로 끌려갔다.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교인들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달려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기도도 해주고 먹을 것도 주고 돈을 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는 밤 12시에 여러 사람을 모아 청량리경찰서로 이송하는데, 파출소 측에서는 남 집사를 보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업무에 방해 된다며 10시도 되기 전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관은 “누군가 고의로 신고한 것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별문제없을 거”라며 안심시켰다.
남 집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것은 맞잖냐?”고 되물으며 “다행히 성도들의 기도 덕분에 바로 훈방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날의 괴로움을 떠올리면서도 그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얼마 후 남 집사를 고소한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다. 건물을 팔려는데 가게가 나가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권리금도 안 받을 테니 미용실만 운영해 주면 좋겠다며 하소연했다. 당장 120만 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수중에는 60만 원밖에 없었다. 급한 대로 친한 집사님에게 빌려 미용실 문을 열었다.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3개월 만에 빌린 돈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심지어 3년 후에는 미용실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다.
그런데 십수 년간 잠도 거의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다 보니 결국 몸이 망가졌다.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치료해도 소용 없다며 돌려보낼 뿐이었다. 수소문 끝에 강남 어딘가에서 생식만 먹고 병을 고친다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몸이 회복됐다.
혼자 걷지도 못해 부축해서 들어온 사람이 이렇게 건강해졌으니 그곳에서 남 집사의 손목을 잡았다. 생식에 대해 공부 좀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경험만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다. 월급을 300~400만 원이나 주었다. 공부도 하고 그렇게 많은 돈을 준다고 하니 힘들게 미용실을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몇 년간 일했다.
IMF 시절이었지만 재정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얼마 후에는 당시 인근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단지 병을 고치러 갔을 뿐인데 몸도 회복하고 편하게 돈도 벌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그때부터는 교회 일에 매진했다. 그러다 다시 몸이 안 좋아졌다. 죽기 전에 시골생활을 꼭 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몸이 다시 안 좋아지니 시골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부동산 경기가 참 안 좋은 시절이었는데, 집이 팔린 것부터 지금 사는 집을 구한 것까지 정말 기적 같은 방법으로 진행됐다.
그러면서 경북 예천신도시로 이사를 왔다. 2021년 3월의 일이다. 당시 예천새움교회가 도움을 많이 주어 ‘이사 오면 이 교회를 다녀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개척교회는 건축헌금에 대한 부담이 있을 거라며 다른 교회에 가기를 권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남 집사는 꼭 예천새움교회에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에게는 46년간 갖고 있던 ‘적금통장’이 있었고 통장에는 어느새 5000만 원이나 되는 적잖은 금액이 모였다. 그리고 지난해 8월 건축헌금을 작정한 지 몇 달 후, 적금을 찾아 헌금했다. 남 집사는 “내 집 살 때보다 훨~씬 기뻤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천새움교회는 젊은 세대가 60%가 넘는 경북도청 소재지에 자리해 있다. 2만5000여 명의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면서 건물 위치도 상당히 좋다. 처음에는 4층의 일부 공간을 월세로 얻어 예배를 드렸는데 옆 상가들이 민원을 넣는 등 어려움이 많아 이전이 필수였다.
드디어 올 3월 놀라운 타이밍으로 6층을 통째 매입했고, 젊은 감각에 맞게 인테리어를 했다. 넓은 카페테리아 공간도 갖췄다. 인근 지역민들에게 감화력 사업, 영어 수업 등을 하기에 정말 좋은 위치와 조건을 갖추췄. 꼭대기 층이다 보니 테라스 공간에서 패스파인더 활동도 마음껏 할 수 있다. 10가정, 35명 남짓 다니는 작은 교회에서 남 집사 부부가 드린 5000만 원은 큰 힘을 발휘했다.
무려 46년 동안 모은 돈이고 하나님의 사업에 귀하게 쓰이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지켜낸 통장이었다. “자식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했지만,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켜낸 ‘적금 통장’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100분의 1도 안 된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얼마 안 되는 목돈이지만 이 헌금이 꼭 필요한 교회를 위해 나를 보내셨다”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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