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이광수와 민족운동 벌인 김창세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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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7.02.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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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명학교 출신의 한국인 최초 보건학박사이자 독립유공자
1908년 가을 내한해 4년간 2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등 초기 한국 의료선교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George Russel(한국명 노설) 박사의 곁에서 그를 도운 이석관 장로의 둘째 사위였던 김창세 박사는 도산 안창호의 동서이자 주치의였다.
한국인 의사가 필요했던 당시 재림교회는 의명학교 교사이자 천재적으로 영민했던 김창세를 의대에 진학시킨다. 1916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8년까지 교단이 운영하는 순안병원에서 근무했다.
1919년에는 상해로 건너가 대총회 산하 홍십자병원에서 일했다. 그해 7월 창립한 대한적십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상해 임시정부의 주요사업 중 하나인 ‘간호원양성소’ 조직과 설립, 교육과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상해에 있던 우리 동포들의 구호․구제활동에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이광수와 함께 대한적십자회 중앙위원 및 감사로 활동한 김창세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모집위원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또한 흥사단원으로서 안창호를 곁에서 보좌하기도 했다. 4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중국인과 서양인 사이에서도 많은 신임과 존경을 받는 외과수술 명의였다. 미국 체류 중에는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식사를 나눌 정도로 친분을 가진 당대 인텔리로 알려진다.
1923년에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위생학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보건학박사가 되었다. 1925년 귀국 후에는 안창호의 지도로 이광수와 함께 ‘수양동우회’의 의사부장으로 활동하며 공중위생교육에 대한 많은 강연을 펼쳤다. 또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함께 ‘육체적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다.
이광수가 재림교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창세 박사를 통해서였다. 그의 소개로 이광수는 ‘상해삼육대학(Shanghai Missionary College)’ 교수로 있던 캉거(M. G. Conger) 목사와 1년간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김창세 박사는 상해 홍십자병원 근무 당시 춘원 이광수 외에도 시인 피천득, 시인 노천명 등에게 재림기별을 전하는 등 전도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광수는 <시조> 창간 30주년 기념호에 보낸 축사에서 “안식일교회를 존경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의 진실하고 청쟁함을 사랑하며 안식일교회의 진실하고 청정한 생활의 모범은 교파의 여타를 물론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성업”이라고 칭송했을 만큼 재림교회와 가깝다.
한편, 의명학교 출신(3회, 4회) 최경신, 허연, 강봉호, 이면식, 유영순 선생 등은 흥사단원으로 활동하며 상해 임시정부와 깊은 관계를 맺은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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